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대 엑셀 (문단 편집) === 국내 === 1980년대 한국의 엄청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80년대 중후반 엄청난 판매량을 보였다. 사실 1980년 무렵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자동차는 고가의 사치품이었고 자동차를 보유한 사람은 부유층이거나 고위 공무원들 뿐이었다. 자동차 보급율은 10가구당 1대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국민소득 증대를 통해 80년대 중후반이 되자 어지간한 가정에 차 한대는 보유하게 되는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는데, 1세대 엑셀, 프레스토는 마이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던 차였다. 그렇게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던 80년대 후반 자동차 시장의 대세는 소형차였고, 중~대형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80년대 중후반 대기업 초급 임원이면 스텔라나 프린스 같은 중형차가, 공립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프레스토가 관용차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80년대 후반에도 중형차는 있는 집에서 굴리는 차였고 대다수의 평범한 중산층 내지는 서민들의 다수는 소형차를 구입했다. 때문에 당시 자동차 시장은 지금과 같이 중~대형 비중이 높지 않았고 소형차 시장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동차 회사에서도 소형차 판촉에 가장 열을 올렸고 1985년에 출시된 엑셀, 프레스토와 더불어 뒤이어 출시된 경쟁 차종인 1986년에 출시된 [[대우 르망|르망]]과 1987년에 출시된 [[기아 프라이드|프라이드]] 모두 불티나게 팔렸다. 이후 90년대 들어서 국민소득이 더욱 향상되면서 중형차 시장이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20~30대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첫차를 사는 연령대도 낮아졌고, 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소형차의 인기는 상당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출시된 것이 2세대 엑셀 X2였다. 1세대보다 젊어진 디자인을 뽐냈고 괜찮은 디자인과 적당한 성능으로 역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2세대 엑셀이 출시될 당시 시장에는 1986년 출시된 [[대우 르망|르망]]과 1987년에 출시된 [[기아 프라이드|프라이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의 평균 자동차 수명은 '''6~7년'''[* 2020년 현재 10년 이상으로 늘어난 것에 비교하면 정말 짧았는데 당시 국산차의 성능이 딱 그 정도였다. 국내 기술이 없어 해외 차들을 [[뱃지 엔지니어링]]으로 들여왔어도 조립 기술 및 강판 방청 기술이 떨어지는 바람에 3년 타면 신차와는 많은 차이가, 8년쯤 타면 폐차 일보 직전일 정도로 하체 부식이 심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비망이 열약해서 단종된 지 오래 지난 경우에는 부품은 있어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996년만 해도 1986년식 차를 길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2021년 현재 2010년대의 초의 차는 흔하게 볼 수 있고, 2000년대 초의 차도 제법 보이는 것은 물론, 심지어 1990년대의 차도 간혹이나마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르노삼성 SM5|SM5 1세대 모델]]처럼 1998년에 출시된 차가 왠만한 2000년대 차들보다 더 잘보이기도 한다. 또한 해외 메이커의 이 차 저 차를 [[뱃지 엔지니어링]]으로 들여오다 보니 모델간 일관성도 없었고 이는 단종시 부품 수급에도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이 80년대 부터 imf 이전까지 폐차를 쉽게 생각하는 풍토가 깔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전 1985년 스텔라의 광고에선 대놓고 교체 주기를 2년 정도로 말할 정도였다.][* 과거 한국의 중고차 시장 추이를 보면 1990년대까지도 국산 중고차=수출 정도로 인식되다가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에 한 번 급성장한 후 2008년 금융위기까지 대체로 답보 상태였다가 이후에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는데 이즈음 해서 국산 중고차도 꽤 몰 만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덕분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 같은 게 벌어졌어도 씨알도 안 먹혔던 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나마 품질이 많이 높아진 지금도 러시아처럼 주행 환경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버스 같은 고가품이 아닌 이상 우핸들 일본제 중고차량을 선호하지, 한국제 중고차량은 찬밥 취급이다. 물론 이는 2000년대 국산차가 원가절감이 워낙 심해 부식이나 소음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고, 러시아에서도 한국제 신차는 일제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가 많다. 국산차도 결함 차종이 아닌 이상 50만 km 주행은 기본인 시대다.]이었다. 현대에서는 이에 따라 1985년에 출시된 X1 엑셀의 후속 차량을 개발했고 그것이 바로 엑셀이었던 것이다. 당시 기아 프라이드는 일본에서 막 들여온 따끈따끈한 차체 설계에 뛰어난 동력 성능과 경제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국내에선 크게 인기를 얻진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프라이드가 해치백이었기 때문. 지금이야 해치백이란 개념이 크게 요상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에는 해치백을 타면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사고시에 바로 골로 간다거나(!) 하는 인식이 많았고, '꽁지 빠진 차'라는 별명을 얻어 미운 털 박히기 일쑤였다.[* 돈이 문제였다. '세단에서 트렁크 길이가 잘린 차'면 손해보는 느낌이 드니까 그만큼 싸야지 싶은데 그 정도로 싸진 않았으니까.] 1988년 프라이드의 베이스인 포드 페스티바, 마쓰다 121에는 있지도 않은 5도어 해치백 모델[* 한국에서 도어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은 최근까지 유리가 달린 문이었으나, 벨로스터부터는 아닌 듯 한데, 이 기준에 따르면 벨로스터는 4도어 차량이다.][* 기아자동차가 내수를 위해 자체 개조한 5도어는 이후에 페스티바, 121로 역수출나갔다. 아예 없지는 않다.], 1990년에는 4도어 세단 모델(프라이드 베타), 1996년에는 5도어 왜건 모델까지 생산하면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다. 많이 팔긴 했지만 시장을 선도하진 못했다. 르망은 한국에 월드카 개념으로 GM의 자회사인 [[오펠]]의 [[오펠 카데트|카데트 E]]를 조립생산한 것인데, 폭스바겐 골프와 경쟁차는 자동차 답게 달리는것에 관련된 기본기에 관한 기술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나, 문제는 카데트 E가 유럽시장에 등장한 것은 1984년으로 다소 오래된데다, 유럽차 특유의 실용적이며 성능위주의 설계사상 때문에 사실상 국내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부분인 안락한 승차감이나 푹신하고 넓은 시트, 우수한 NVH, 내장재의 내구성과 변형으로부터 확보되는 실내부품의 내구성, 그러면서도 뛰어난 정비성 등의 부분들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차량이 아니었다.[* 때문에 엑셀이 출시된 이후에도 르망이 한국에서 "고속도로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986년 3도어 해치백 레이서와 르망살롱(GTE), 1988년 5도어 해치백 펜타파이브, 1989년 GSI와 1.6 TBI, 1990년 임팩트, 1991년 이름셔 등 정말 다양한 엔진 및 트림을 내놓았고, 특히 날렵한 디자인과 중후한 승차감, 다른 차량에 비해 넓은 실내공간으로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르망은 소형차 중에 가장 고가였고, 젊은이들이 돈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대륙 국가의 실정에 맞춰져 고속 주행에 중점을 둔 기어비 때문에 가벼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둔중하기 이를 데가 없이 느껴지는 낮은 순발력에, 당시 대우차 특유의 엉망진창인 조립 품질이 더해져 시장에서도 고만고만한 판매율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엑셀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다. 1988년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Y2 쏘나타의 얼굴과 꽁무니를 그대로 이식한 듯한 모습에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스타일은 소형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후한, 40대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실내 디자인은 소형차의 기본에 충실하였고, 쏘나타에 달리던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를 달아 힘과 연비를 동시에 잡았다.[* 다만 이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MPI)가 달린 모델인 TRX와 GLSi 모델의 경우 당시의 일반 배터리가 아닌 특수 배터리를 순정으로 장착해야 했기에, 차량 유지비가 조금 더 나가기도 했다.] 당시 잡지 기사를 보면 엑셀을 마치 스포츠카처럼 묘사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균형잡힌 기어비[* 전반적인 기어비가 프라이드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굉장히 길긴 하지만, 프라이드나 엑셀이나 기어비가 길다한들, 1단의 기어비가 워낙 높아서, 결국엔 5단의 nv ratio가 기어비가 아주 짧은편의 르망의 5단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프라이드나 엑셀은 1단에서 40km/h정도면 거의 레드존 이지만, 르망은 혼자 1단에서 60km/h 가까이 찍어낸다.]와 리스폰스가 우수한 엔진의[* 당시 미쓰비시 엔진들은 그 귀하고 비싼 [[카르만 효과|칼만와류]] 방식의 에어플로우 센서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왠만한 스포츠카도 울고 갈 뛰어난 엔진 반응을 보여 주었다. 칼만와류 방식의 에어플로우 센서는 나름 비싸다는 핫필름 방식의 센서를 '싸구려'로 전락시킬 정도로 고가이다.] 감각 덕이지, 실 성능은 체감 성능만큼 라이벌들을 압도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엑셀의 공차 중량은 950kg으로써, 860kg인 프라이드는 고사하고 935kg인 르망보다도 무거웠다! 한마디로 중량이 동급에서 가장 돼지였다(...). 당시도 그렇고 최근까지도 '대우(쉐보레)차는 무겁고 현대차는 가볍다' 등의 통념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엑셀과 비슷한 시기의 쏘나타도 로얄살롱보다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가볍고 대우차는 무겁다는 통념이 생긴 것은 대우차의 변속기 세팅 때문에 초반 가속이 굼떴기 때문이다. 준중형급의 경우 크루즈(라세티 프리미어)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대우차가 무거워졌고, 그 전에는 언제나 엘란트라/아반떼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실제 운전자들의 체감 성능은 매우 경쾌하고 날렵했으며, 연비 면에서 프라이드와 비교해서도 그다지 꿀리지 않으면서 결정적으로는 현대자동차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세팅이자, 한국사람들이 차량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부드럽다 못해 물컹할 정도의 안락한(?) 승차감 또한 라이벌들의 경쟁력을 깎아내렸다. 현대가 기본적으로 스프링과 댐퍼를 워낙 무르게 세팅한 탓도 있지만, 구조상으로도 프라이드나 르망은 리어에 토션빔 서스펜션을 채용했지만, 엑셀은 리어에도 독립식 서스펜션인 풀 트레일링 암 방식을 채용했기 때문에[* 덕분에 2000년대 이전의 옛날 현대차는 엘란트라와 아토스를 제외하면 의외로 토션빔 서스펜션을 사용한 자동차가 없다. 엑셀의 후속인 엑센트의 리어 서스펜션은 스트럿 방식을 조금 변형시킨 듀얼링크 타입으로 진화한다. 르망과 프라이드의 후속이었던 라노스와 아벨라는 계속해서 토션빔으로 생산했다.] 승차감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수준이었던것. 거기에 쏘나타를 닮은 중후한 맛의 디자인과, 당시에는 국내 자동차 제조사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조립 품질을 자랑하던 현대자동차의 나름(...) 치밀한 실내 마감[* 당시의 대우 에스페로보다 현대 엑셀의 인테리어 재질이 더 좋다. 대우는 이 당시 이제 막 고유모델을 내놓기 시작하던 시절이라서 경험 부족이 매우 심했으나 현대는 이미 오랫동안 자체 모델을 내놓아 왔으므로 상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상태라서 벌어진 대우의 비극이다. 특히 X2 엑셀은 전 세대인 X1 엑셀(포니엑셀)이 미국시장에서 품질 문제로 곤혹을 치뤘던 만큼 품질 향상에 크게 공을 들였던 것도 한몫 하였다.] 등으로 인해 소형차 임에도 그리 궁색해 보이지 않는 그런 차가 나타난 것이다. 현대차 모델 포지셔닝의 승리이다.[* 이후 국내 자동차 관련 언론에서 현대의 모델 포지셔닝을 기준으로 차급을 선정하는 것이 대세가 됨에 따라 경쟁사 차들 중 현대차 기준 포지셔닝에 잘 안맞는 차들(즉 소형인지 중형인지 애매한 차종)은 더 성능이 우수한 모델이라도 심한 판매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5W19r200ddo)]}}} || || [* 광고에 나오는 여자아이 모델은 [[김민정(1982)|김민정]]이다.] || 엑셀은 등장과 동시에 거의 매달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월 1만대는 기본이었고, 신차효과발로 가끔 한두번은 월 2만대를 넘겼다.]. 한 두 번 프라이드에게 자리를 내주었었고, 엘란트라에게 한 번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1992~1993년을 기점으로 점점 소비자들이 준중형, 중형차량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엘란트라와 쏘나타 II[* 이 모델과 1995년 출시된 [[현대 아반떼|2세대 아반떼]]는 출시 이후 '''월 평균 1.5 ~ 1.6만대 수준'''으로 팔리며 국산차 시장에서 재력가 수준의 시장 지배력을 행사했다.] 에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럼에도 1994년까지 수출 포함 144만여대를 판매하여 밀리언셀러를 달성했고, X1 엑셀과 합하면 250만여대를 판매하여 현대자동차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한마디로 1980~1990년대의 현대자동차의 엑셀 수출이 그 당시 현대자동차의 대부분의 수익을 이룩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